완전한 구원
Romans 3:21-26P. G. Mathew | Sunday, July 06, 2008
Copyright © 2008, P. G. Mathew
Language [English] [Armenian]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1)
레온 머리가 말하기를 로마서 3장 21절에서 26절 까지의 말씀이 지금까지 쓰여진 말씀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이 구절이 성경의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세가지 측면 즉 의롭게 되는것, 구속 그리고 대속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은혜로 인해 의롭게 되는것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최근에 종교와 생확에 대한 잡지인 퓨포름에서 성인 36,000 명에게 다수의 종교들이 사람들을 영생으로 이끌수 있는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힌두교인들의 89% 가 영생으로 이를수 있는 종교가 다수 있다고 답했읍니다. 그리스 정교인들의 72%, 천주교인들의 79%, 그리고 자유주의 기독교인들의 83% 도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기독교인들의 57% 마저도 다수의 다른종교들도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수의 다른 종교들도 우리를 영생에 이를 수 있게 할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오직 예수님안에서만 영생을 찾을수 있다는 성경과는 반대 되는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사도들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은 “용서나 구원이 합당하지 않고 오로지 심판밖에 받을수 없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용서함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주신다고 선포 하는것은 오직 기독교일뿐 다른 이념이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영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로마서 3장 21절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대
로마서 3장 21절에서 바올은 “그러나 지금은 ..” (헬라어: 누니 데이) 이라고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라는 말은 과거의 구원과는 대조가 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사도 바올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을 악한 행동으로 짖누르는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올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분노 아래에 있으며, 의로운 자도 없고, 이해하는 자, 하나님을 찾는자, 또는 선을 아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자도 없다고 했읍니다. (로마서 1:18-3:20)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무기력한 죄인들이라고 로마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조차 하나님을 증오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수가 없습니다. 죄로 인해 지옥에 밖에 갈수 없는 사람들은 선한 공로로 자신을 구원할수가 없습니다. 바올사도께서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라고 하셨습니다. 모든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우리를 죄에서 구해줄 다른이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구해주실수 있는분은 오로지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 때가 이르매 은혜의 시대 즉 하나님의 구원이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땅에 오신것입니다. 바올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라고 말하셨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사도 바올은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무지를 받아주셨으나 지금은 모든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있읍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은혜의 시대 즉 구세주의 세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작가는 말하기를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을 얻을수 있는 때, 예수님께서 죄, 죄책감, 정죄, 사탄, 죽음 그리고 지옥으로 부터 죄인을 해방시키신 그때 입니다. 사도 바올께서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고린도 후서 6: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창세기 3장 1절에서 말씀하신 구세주에 대한 첫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때입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의로움
사도 바올은 로마서에서 새로운 이 시대에 어떤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1).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것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는 이 의는 바로 하나님의 의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든자들에게 그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를 옳다 하시기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로마서 4:25) 모세가 올린 동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독뱀의 독으로 부터 나음을 받은것 같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복음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율법과는 별개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의로움은 “혤라어:코리스 모무우” 즉 율법과는 구분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원 받는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좋은일을 하면 스스로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잘못 가르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은 유대인의 잘못된 생각에 대해 누가복음 18장에서 예를 들어 말씀하셨읍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아닌 자신 스스로의 공로로 받는 구원에 대해 가르키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같은 민족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분을 거부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어느 누구를 구원할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법이 아닙니다. 사도 바올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올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선한 행동으로 영광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로마서 4: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가 율법에 의존하는 자들에게 나타 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악화 시킬뿐만 아니라 더욱 증가 시키는 것입니다 :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20)
죄의 노예인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완벽하게 지킬수 있겠습니까? 지킬수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9절과 7장14절에서 우리는 “죄의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의미는 우리가 죄의 압제와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죄의 굴레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만 하셨습니다.
천사가 조솁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1)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안에서 구원하신게 아니라 우리를 죄로 부터 즉 죄의 권세와 다스림으로 부터 구원해 주신것 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36)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께 나올때 우리는 우리의 공로에 대해 아무 주장을 할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 스스로 구원할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만 구원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공로를 토대로 하는 간청은 오히려 우리를 정죄하게 할뿐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5) 당신은 세상적이십니까? 악하십니까? 죄인이십니까? 죄책감에 억눌러 있으십니까? 그러신다면, 예수님께 오십시요. 그분께서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나하면 하나님께는 모든것을 가능케 하실수 있으시니까요.
새로운 구원이 아님
21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구약 전체에서도 믿음을 통한 은혜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윗과 모든 구약의 성인들께서도 사도 바올께서 로마서 4장과 히브리서에서 말씀 하신것과 같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38, 하박국 2:4) 사도 바올은 로마서 4장에서 다윗의 글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기를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7-8)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희생양 제사 역시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말씀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누가복음 24:26-27, 46-47) 라고 하셨습니다.
신약과 구약 모두 구원에 대해 한결 같이 이야기 하고 있읍니다. 구약 전체에서도 율법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의로움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은 새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셨읍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의 공로로 이루는 구원에 대해 전혀 가르치고 있지 않읍니다. 자신의 행동에 자신만만한 그 바리새인은 죄를 용서함 받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누가복음 18:14)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값없이 받은 의로음
예수님을 믿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 했읍니다.(로마서 3:24) 의로음, 의롭다 라는 단어들이 일곱번 이구절에 쓰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신성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움만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것은 로마서 3장 21절에서 말한것과 같이 죄인이 한번에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주셨고, 우리는 그 의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의롭게 됨을 받은 것입니다.
웨스트 민스트 대 요리 문답 70번에 보면 “칭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서, 그가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보아 받아주시는 것인데, 이는 결코 그들의 노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가시키고 믿음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전적인 만족 때문이다.”라고 답하고 있읍니다.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이 시행되기를 기다리는 죄수가 죄가 없는 다른 사람이 이죄수를 너무나 사랑하여 대신 사형을 받기로 함으로써 그 사형수는 석방이 되어 집으로, 부인에게,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이게 바로 칭의, 즉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바라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 가심으로 집으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의롭게 된다 라는 단어는 하늘나라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신명기 25장 1절에는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4장 5절에서 사도 바올도 “경견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사람들을 의롭다 하신다는것이 모순 처럼 보이지 않으십니까? 판사는 죄가 없는 사람을 없다고 그리고 죄가 있는 사람을 있다고 판결 내려야 하는것 입니다. 판사의 직업은 죄를 있게 또는 없게 만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이며 도덕적이지도 않는 사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의 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라고 칭하여 주셨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때 우리가 의롭게 됐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의 본질이 의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것은 성화가 아닙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진 우리를 대신 해서 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죄에 대한 벌도 감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PGM) 이 세상에서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선포하신 것은 번복할수도 돌일킬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세상 최고 재판장께서 선포하신것에 감히 도전할수 있겠습니까? 의롭다 하심을 받는것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성화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법적으로 의롭다 하신 하나님 아버님께서 우리를 변화되게 하실것 입니다. 사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것이 않입니다. 보이스 제임스는 말하기는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것은, 즉 삶이 의롭게 되는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것에 따라오는 형상으로 삶이 의롭게 변하지 않는다면 의롭다 칭함을 받은것이아니라 해도 틀리말이 아닙니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의롭다 칭함을 받은이가 선한행동을 하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거나, 거룩하거나 신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의롭다 칭함을 받은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롭다 칭함을 받은것은 성화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 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것과 성화, 즉 하나님으로 부터 전의 되는 의와 성취되는 의에 대해 잘못알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의로움을 받는것이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이루는것이라 믿기 때문에, 의롭다 칭한을 받는 그순간 우리가 실제적으로 성화가 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의 가르침은 의롭다 칭함이 우리 자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수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는 반드시 성화하게 되어있습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이는 점차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착한 행실은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공로를 기반으로 해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성화되게 하시며, 세속적인 사람들을 경건하게 만들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순종하게 하고 불신앙의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올이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24) 라고 했습니다. 바올은 현재 수동형 동사를 써서 우리 스스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읍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공로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의 근원
우리를 의롭다 하심의 근원은 무엇 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올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의로운 사람이 아니며 스스로를 구원할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되었으며 무기력 합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것입니다. 이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 진것이지만 아주 비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댓가를 받게 하신것 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해 주셨을때 그리고 이삭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수 있었을때 아브라함의 기쁨을 생각해 보십시요.(창세기 22 장) 이삭을 대신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양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은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짓으시며 돌아가신 그 댓가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싸구려 은혜는 멀리하십시요. 값 비싼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의롭다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비난을 받을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의롭다 하셨고,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하늘나라를 주셨고, 영원한 죽음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은혜는 우리의 모든죄를 덮고도 넘침니다. 사도 바올은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로마서 5:17, 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더욱 잘할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후서 9:8) 이 은혜는 또한 우리를 즐겁게 해줍니다. 헬라어로 은혜라는 말은 기쁨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주 비싼 선물이지만 우리에게는 값없이 주어 졌습니다. 은혜를 살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은혜는 오직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말하시기를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우리는 이 은혜를 값없이 살수 있지만 우리가 가질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비싼 선물인 것입니다.
요한은 “또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2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요한은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 계시록 22:17)라고 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구원받을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시편의 저자와 같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편 42:1-2) 라고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큰 잔치를 준비하는 왕으로 표현되고 있읍니다. (마태 복음 22:1-14, 누가 복음 14:15-24) 초청받은 손님들은 한결같이 “나는 땅을 샀고, 소를 샀고 그리고 결혼해서 잔치에 갈수 없습니다.” 라며 잔치에 오는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가난한 사람들, 절음발이들, 장님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 했습니다. 우리를 능력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풍성하시고, 충만하신 은혜는 부자나, 유명인이나, 교만한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가난한자, 저는자, 장님들에게 주어졌읍니다. 이 크신 구원이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짓는 창녀들과 평민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크신 구원이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말한 그 사형수를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파라다이스 문을 열어 주셨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히 잔치를 할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헤롯왕이나, 빌라도나, 바리새인, 사두새인들 위한 것이 않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죄인들만 당신의 크고 풍성한 은혜로 구원해 주십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은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낮아지신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려 오신것이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관대히 우리에게 주신것입니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롭다 하심의 기반
의롭다 하심의 기반은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특사가 아니라 원칙에는 없는 용서하심 입니다. 의롭다 하심은 나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보여진 하나님의 공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죄가 없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기 양에게 부어 진것입니다. 어떤이들은 십자가 없이는 불의에 대한 의롭다하심은 블공평하고, 부도덕하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악한이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신것 입니다.
사도 바올은 로마서 1장18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경스런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에서 사도 바올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4장 5절의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자를 의롭다 하셨다.” 라는 구절을 이해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건치 않은자들을 위해 돌아 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유월절 양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 복음 1:29)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베드로 전서 1:18, 3:18) 이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올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 후서 5:14) 라고 하셨읍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의 모든 요구사항을 채워주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실때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바올은 ”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4:8) 이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음 이라는 선물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도 바올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9)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의 분노나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습니다. 더이상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아래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대속을 기반으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고 영생과 영화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로 받아 들임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고 예수님의 모든것이 우리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님과 교제를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올은 복수 거래에 대해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후서 5:19, 21) 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우리에게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 것이 되었고 예수님은 이를 속죄하셨고 예수님의 의로움은 우리의 것이 된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른 편지에서도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린도 전서 1:30) 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이시고 성화이시며 대속물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전부 인것과 같이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으면 우리는 성화가 될것이고 영화가 될것입니다.
더이상 무화과 나무잎 아래나 더러운 걸레와 같은 자신의 의로움에 숨으려 하지 마십시요. 인간의 공로라는 더러운것을 더이상 자랑하지도 마십시요.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덮어져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곧 우리에게 시행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적시 적때에 우리가 아닌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바라보시고 구원을 받으싶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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